안 태 봉 논설위원/시인
안 태 봉 논설위원/시인

한국독도문학작가협회(이사장 조동운)에서는 지난 10월 25일 오후4시 부산지하철 명륜역사에서 겨레의섬 獨島! 제12차 독도사랑 시화전을 40여 명의 회원이 동참한 가운데 독도가 절대 일본땅이 아니라는 것을 천명한 독도사랑 시화전이 오랜만에 열렸다.

아시다시피 고종황제께서 1900년 10월 25일 관보41호를 통해 "독도는 한국땅" 이라는 것을 밝힌 것에 기인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이를 증명하는 전시회가 10월 24일 9시 경상북도청 본관 1층 전시실에서 한일문화연구소 주최와 독도의병대, 해동독도연구회 주관으로 열린 '독도자료전시회'가 있었다.

이 전시회에는 2급 비밀문서라는 표식이 선명한 그야말로 일본 정부에서 만든 문서로서 애도막부 일본지도 학자가 그린 고지도에 독도는 조선땅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어 일본이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엄연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자기네 선배들이 주장한 사실을 왜 그렇게 끈질기게 부인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국독도문학작가협회에서는 제122주년 독도칙령의 날을 기념하여 한일문화연구소 소장 김문길 교수가 일본에서 어렵게 찾아낸 자료, 독도는 한국 것이라고 입증할만한 것을 독도를 관리하고 있는 경북도청에서 전시하게 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과거에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많은 의병들이 일어나서 생명을 아끼지 않고 오로지 애국충정의 뜻에 앞장섰듯이 지금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한민족이 국내외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독도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가고 있다.

사례를 하나씩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독도 도해령(渡海令) 1617년 5월 16일 작성자 돗토리 시마네현 통치자 마쓰타이라 신타로 수신, 오야 신기찌와 무라카와 시헤이에 내용,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1417년에 독도는 물론이지만 울릉도에 사람이 살 수 없도록 했다.

공도정책은 왜구들의 약탈과 이민족의 침입, 범죄자들이 울릉도를 도망을 가서 생활하는 자가 많으니 사람들은 살지 못하도록 한 것이 큰 이유이다.

공도정책으로 조선인이 살지 못하는 틈을 타서 일본인들이 자기네 영토처럼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불법으로 고기를 잡아갔다.

내용을 보면 '죽도(울릉도.독도)에 들어가 고기를 잡은 것과 같이 앞으로도 고기를 잡도록 허가하니 도해하기를 바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와 독도를 지킨 안용복, 박어둔이 일본 어선들의 손에 잡혀 일본에 갔다.

일본어를 잘하던 안용복, 박어둔은 울릉도 독도가 조선영토라는 것을 명백히 말했다.

독도를 지킨 안용복, 박어둔이 귀국했으나 1696년 1월 28일 죽도(독도.울릉도)에 다시 금지령이 내려졌다.

②죽도(竹島) 도해금지령, 1696년 1월 28일 작성자, 돗토리 시마네현 통치자 마쓰타이라 신타로 내용, '예전에 마쓰타이라가 백주(옛명.돗토리 시마네현)에 영주로 있을 때 말씀드려서 백주 요나고 주민 오야신기찌와 무라카와 시헤이에가 죽도에 도해하였고, 지금까지도 어로를 하고 있다.

앞으로도 죽도에 도해하는 것을 금하라는 명이 계셨으므로 그 뜻을 받들도록 하라는 것이다.

죽도는 조선땅이니 들어가지 말자는 것이다. 1693년 4월 18일 독도를 지킨 안용복과 박어둔이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죽도는 조선 땅이라고 강력하게 얘기하니 도해금지령이 내렸다.

문서가 내린 동기는 안용복과 박어둔이 독도를 지키고 영주께 강력하게 얘기한 탓이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의 일부가 죽도는 울릉도를 말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울릉도를 죽도라 했지만 1853년 도해금지령이 내려져도 밀업을 한 '하치수에문'을 사형시켰다.

명치 9년에 내린 일본문서에 보면 도해령 때문에 일본어선들이 독도까지 접근하지 못했다는 기록이다.

이것만 보아도 울릉도, 독도는 한국 땅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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